- 비수로 돌아온 조선의 "적폐 기술"
수필가 피천득 선생은 이렇게 썼다.
"어리석은 사람은 인연을 만나도 몰라보고,
보통 사람은 인연인 줄 알면서도 놓치고,
현명한 사람은 옷깃만 스쳐도 인연을 살려낸다."
꼭 인연만일까.
손에 들어온 기회를 기회인지조차 모르고 놓친 뒤
오히려 당하는 어리석음을 역사는 기록한다.
1543년, 일본 규슈 남단 다네가시마(種子島)의 도주 도키타가(時堯)는
표착한 중국 상선에 타고 있던 포르투갈 선원으로부터
- 머스킷(화승총) 두 자루를 샀다.
대가는 은 2000냥. 지금 가치로 치면 대략 20억원이다.
당시 물가 수준으로 병사 200명을 1년 동안 유지할 수 있는 돈이다.
변방의 도주는 어떻게 이런 많은 은을 갖고 있었을까.
그 궁금증을 거슬러 올라가다 보면 조선에서 유출된 첨단 제련술을 만난다.
연은(鉛銀)분리술. 광석에 섞여 있는
- 납과 은의 녹는 점 차이를 이용한 획기적 기술이다.
함경도 단천 광산에서 일하던 양인 김감불과 노비 김검동이 개발해
연산군 앞에서 시연했다는 기록이 있다.
연산의 관심은 은으로 살 수 있는 명나라 비단에 있었겠지만,
아무튼 이 기술은 한때 조선을 은 생산 강국으로 만들었다.
그러나 반정에 성공한 중종 세력에게
- 이 기술은 사치와 향락을 조장하는 '적폐'일 뿐이었다.
사치 근절과 농업 장려라는 명분 속에 단천 광산은 폐쇄됐고(1516년),
신기술은 설 곳이 사라졌다.
단천 광산 폐쇄 17년 뒤,
- 길 잃은 조선의 제련술을 반긴 곳은 일본 이와미(石見) 은광이었다.
조선에서 건너간 것으로 추정되는 두 명의 기술자가 새 제련술을 선보였다.
변변찮던 이와미는 순식간에 세계 2위 은광이 됐고,
- 일본은 은이 넘쳐나는 나라가 됐다.
적폐로 몰려 쫓겨난 조선의 기술이 아니었다면
변방의 도주 손에 들려 있던 은 2000냥은 없었을지 모른다.
49년 후, 복제와 개량을 거듭한 두 자루의 머스킷은
- 조총으로 바뀌어 조선의 심장을 겨냥했다.
500년 전 역사는 한국형 원전 기술 유출 논란을 계기로 현재와 오버랩된다.
원전 운영 진단 프로그램인 냅스(NAPS)라는 첨단 기술이
UAE와 미국 회사로 빼돌려졌다는 의혹이다.
탈원전 탓 아니냐는 의구심을 한국수력원자력(한수원)은 극구 부인한다.
내부 절차에 따른 정당한 기술 수출이었고,
산업스파이로 의심받는 간부의 이직도 현 정부 출범 이전 일이라는 것이다.
의혹은 수사를 통해 밝혀질 일이다.
그러나 세계 최고 수준인 한국의 원전 기술이
한국 땅에서 점점 자리를 잃고 있다는 사실은 부인하기 힘들다.
지난해 한수원•한전기술•한전KPS 등 원자력 관련 공기업 3사에서
제 발로 나간 인원이 144명이다.
탈원전 정책 시작 전인 2015년의 두 배 수준이다.
이들 중 상당수가 해외 원전 기업으로 이직했다.
이들의 머릿속에 있는 것이 다 기술이요, 노하우다.
싹수 노란 가능성에 매달릴 후진들도 없다.
서울대의 한 원자력 교수는
- "몇 년 전만 하더라도 연구실이 늘 떠들썩했는데,
요즘은 적막강산"이라고 하소연했다.
50년 쌓아온 원전 생태계가 무너지는 현장이다.
이런 풍경이 어디 원전뿐인가.
세계적 경쟁력을 갖춘 제철소는 환경 적폐 오명 속에
- 조업정지를 당할 판이다.
세계 어디에서도 문제삼지 않는 고로 정비 방식이
- 유독 한국에선 문제가 됐다.
4대강 적폐 청산 구호는 기어코 보(洑)를 허물겠다는 기세다.
거금을 들여 개발한 해외 광산은
- 자원 외교 적폐 딱지가 붙여진 채 헐값 처분을 기다리고 있다.
어떤 게 구정물이고, 어떤 게 아기인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