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흔이 돼서야 손주에게 한글을 배웠다
누구에게나 닥칠 노년의 삶과, 인생이란 무엇인지
조용히 자신을 뒤돌아보게 한다.
"그 구가 이 내 마음을 달래 주나"
산 마을로 너머 가시는 햇님은
어김없이 너머 가시네.
햇님 나는 나는 쓸쓸해.
가슴이 허전해. 가슴이 서러워.
흘러 흘러 저 배는 어디로 가는 배냐?
앞쪽으로 타는 사람은 먼 수평선을 바라보고
뒤쪽으로 타는 사람은 그 누구를 기다리네...
햇살이 고개를 들면 그는 창가로 다가가
햇님에게 인사 하는 것으로
하루 일과를 시작한다.
한 시골마을에서 300여평 남짓한 텃밭에
무, 배추, 호박, 가지, 고추 등
갖가지 농사를 지으며 사는 홍 할머니.
밭일을 하는 동안 그는 외롭지도 아프지도 않다.
그들과 이야기를 나누기 때문이다.
잘 들리지 않아도 TV를 켜 놓으면
그래도 조금이나마 위안이 된다.
안타깝게 여긴 자식들이 서로 모시겠다고
하지만, 그는 꿈쩌도 하지 않는다.
자유롭게 살기 위해서다.
변이라도 당하면 어떻게 하느냐는
자식들이 걱정하면 그는
"그렇게 죽는 게 복" 이라고 대답하며
혼자이기를 고집한다.
홍 할머니는 새 내복 보다
낡디 낡은 헌 내복을 더 좋아한다.
아들, 딸, 조카들이 사다 준 새 것을 마다하고
헌 내복을 입는 데는 다 이유가 있다.
내다 버리려고 했던 내복을 또 빨아 입었다.
낡은 내복을 입는다고 딸들은 야단이다.
딸들이 사다 준 내복 조카들이 사 온 내복들이
상자에 담긴 채로 쌓여있다.
휘질러 놓으면 뭐하나 해서다.
쌓아 놓은 것을 보면 헌 옷을 입어도 뿌듯하다.
나 죽은 후에 다른 없는 이들입게 주면
얼마나 좋으냐 싶다.
딸년들은 낡은 못을 버리라고 야단이다.
추수가 끝나면 홍 할머니는
싸앗 봉투마다 이름을 적어 놓는다.
혹여 내년에 자신이 심지 못하게 되더라도
자식들이 씨앗을 심을 수 있게 하기 위함이다.
가장 큰 즐거움이라는 홍 할머니가
1994년 8월 18일에 쓴 일기 전문이다.
마을 만들어 가며 읽어야 한다.
공부를 못해서 아무 방시도 모르고
허방지방 순서도 없이 글귀가 엉망이다.
그래서 무언가 이야기를 하고 싶어
연필을 들면 가슴이 답답하다 말은 철철 넘치는데
연필 끝은 나가지지 않는다.
얼마나 답답하고 힘든지 모른다.
아버지가 원망스럽다.
내가 국미나교 문턱에라도 가 봤으면
그 쓰는 방식이라도 알았으련만
아주 일자무식이니 말이다.
아이(손주)들 학교 다닐 때 어깨 너머로
몇 자 익힌 덕분이다.
전화를 걸고 싶어도 못했다.
숫자는 더 깜깜이었으니까
70이 가까워서야 손자 놈 인서이 한테
숫자 쓰는걸 배웠다.
내 힘으로 딸네 집에 전화 했던 날을 잊지 못한다.
숫자를 누르고 신호가 가는 동안
가슴이 두근두근 터질것만 같았다.
장원급제 한 것보다 더 기분이 좋았다.
너무 신기해서 동생네도 걸고 자식들한테도
자주 전화를 했다.
딸들이 가끔 메모한 것을 보며 저희들끼리 죽으라 웃어댄다.
멸치는'메룻찌'로 고등어는'고동아'로
오만원은 '오마년'으로 적었기 때문이다.
약속장소를 불러 주는 걸 적었는데
동대문에 있는 이스턴 호텔을
'이슬똘 오떼로'라고 적어서
딸이 한 동안 연구를 해야 했다.
그러나 따들이 웃는것은
이 에미를 흉보는게 아니란 걸 잘 안다.
그래서 이 구석 저구석
써놓운 글들을 숨겨 놓느다.
이만큼이라도 쓰게 된 게 다행이다.
글씨 큰 동화책을 읽을 수도 있다.
인어 공주도 읽었고, 자크의 콩나무도 읽었다.
얼마나 답답한 일인지 모른다.
잠 안 오는 밤에 끄적끄벅 몇 마디나마
남길 수 있게 되었으니 더 발랄 게 없다.
말벗이 없어도 공책에다
내 생각을 옮기니 너무 좋다.
공부만은 꼭 시킬 일이다.
딱히 외출할 계획도 없는데
설레이는 마음으로 고무신을 닦아
햇볕에 말린 홍 할머니
다시 먼지가 쌓이고
그는 신어 보지도 않은 채
더러워진 고무신을 또 닦아 햇볕에 내 놓는다.
어디 가게 되지 않으니
신어 보지도 않고 다시 닦게 된다.
어디든 떠나고 싶다.
눈물짓는 홍 할머니
어린 자식이 숨지는 것을
바라보고 있을 수 밖에 없었던
살날 보다 살아온 날이 많은
노년의 외로움이 절절리 담긴 그의 일기는
그만의 일기가 아니다.
한 여인의 일기요.
우리네 어머니의 일기이며 이 땅에 발 딛고 살아가는
우리모두의 일기다.
너무 감동적인 글이라 여러분과 함께 공감하고 싶어
올렸으니 늙으신 어머니를 생각하며 묵상하시길 바랍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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